처음 컴퓨터를 가지게 된 것이 고2때 1984년이었다. 아버지 사업 용도로 Apple II 를 사셨는데, 워낙 컴퓨터 초기였던 탓에 제대로 된 사전 조사 없이 사셨다가, 용량부족으로 나한테 넘기셨다. 전원을 키면 검은 스크린에 그린 커서가 깜빡이고, 바로 basic 명령어를 받게 되어 있었다. Basic 이란 언어를 처음 접한 것도 그때였고, 필요 없다는 동생 연습 문제를 만들어 주겠다고, 프로그래밍이란 것을 처음 해 본 것도 그때였다. 터미날 지하상가에 카세트 테이프에 게임 프로그램을 저장하여 파는 가게가 생겨났고, 집에 있는 카세트 데크를 컴퓨터에 연결해 LOAD “프로그램실행파일” 명령어를 쳐주고, 카세트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한참동안 커서가 껌뻑되다, 30초정도 지나면 게임이 실행되고는 했다.
정지훈이라는 의사겸 IT 전문가가 펴낸 일종의 IT 산업 연대기인데, 책속에 간혹 보이는 저자의 IT 경험을 보면 나이가 나보다는 5년정도 차이가 나지 않나 싶다. 고루한 IT 책 보면 1900년대 초반 베바지인가 뭔 수학자 얘기 들먹이며, 컴퓨터의 아버지이니 1940년 애니악이 최초의 컴퓨터이니 하는 것과는 달리, 소비재로서의 컴퓨터 1974년 Apple I 을 시점으로 하여,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IBM,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그리고 구글부터 최근의 Facebook 까지 철저히 소비재로서의 컴퓨터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책의 내용은 말 그래도 거의 모든 IT 의 역사이다. IT 쪽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고, 내용 자체도 술술 넘어간다. 다만, 마이크로소프트니 애플이니하면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만 떠올렸던 것과는 달리, 이들의 리더쉽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혼자서 모든 혁신과 발견을 이루어 냈을리 없다. 조직내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한 임직원들, 회사의 초창기 발전에 지대한 역활을 했던 선구적 투자자들의 이름이 많이 보인다. 어찌 보면 고등학교때 락의 역사를 알겠다고, 1960년대 야드버즈니, 3대 기타리스트니 하고 달달 외울때 느낌도 좀 난다.
책의 구성은 단순하다. 삽화나 그림은 하나도 없다. 대신 중간 중간 QR 코드가 삽입되어 있는데, 스마트폰 QR 앱을 가져다 되면 유튜브 동영상등 관련 site 로 이동한다.
IT 의 초창기 비지니스의 승기는 어찌 보면 혁신과 새로움보다도 타이밍과 기회활용 그리고 운에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계약과 라이센스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협상의 기술과 베짱이 중요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하나, 궁극적인 승리는 누가 얼마나 멀리 바라보느냐에 달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산업계의 초기에 항상 나오는 공통적 스토리 아닐까 싶다. 산업구도는 3강체제를 선호한다는 말이있다. 초창기 수백, 수천개에 달하던 업체가 경쟁력의 차이로 점점 솎아 지고, 결국은 강자 몇이 남게 된다. 산업이 진화하고 발전하여 이러한 과점 체제가 허물어 지고, 다시 반복되고…
결국 최후의 승자는 얼마나 멀리 보며,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느냐이다. 지금 회사가 몰입하고 있는 메디칼 뷰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