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오랫만에 쓰는 글이다.

아침에 일어나 어떤 책을 읽은데 이런 글이 눈에 띤다. 피터 드러커 선생이 한 말이란다.

“If a new venture does suceed, more often than not it is

1) in a market other than the one it was originally intended to serve;

2) with products and services not quite those with which it had set out;

3) bought in large part by customers it did not even think of when it started;

4) and used for a host of purposes besides the ones for which the products were first designed.”

미래라는 것이 애초에 마음먹은 대로 설계한대로 일이 풀려나가면 좋으련만, 피터 드러커 선생 말씀대로 좋은 미래라는 것은 대부분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 찾아오며, 대부분 나쁜 미래가 기대한 대로 일이 풀릴때 찾아오기 마련이다. 읽던 책을 덮으며, 50년 가까운 내 인생에 소위 터닝 포인트라 할만한 것이 어떤 것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1) 상문고 입학

발단은 중2때까지 잘 살던 압구정동에서 집평수 늘이겠다고 반포로 이사온 것이었다. 중학교 역시 압구정동 초딩수가 폭증하며, 학교가 모자라 밀려 잠실에 있는 신천중학교로 간 터라, 막상 고등학교 입학하니 중학교는 물론이요, 초등학교 동창놈들 하나 눈에 안 띠더라. 중3때 찾아온 두발 자율화로 덥수룩하게 길렀던 머리 빡빡 깎은 것은 억울하지만, 고등학교 3년동안 인생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고, 불공평한 인생에 맞서려면 집에 돈이 많거나,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거나, 둘다 아니라면 싸움이라도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2) 식품공학 전공

고2때 아버지가 중고 애플2 컴퓨터를 사주시면서 내 꿈은 프로그래머였다. 컴퓨터가 마구 좋았다. 대학은 전산과로 일찌감치 정해 놓았다. 생각보다 학력고사 점수가 안 나와 줬지만, 예년 커트라인에 비추어 연대 전산과 갈 정도는 되었다. SKY 아니라도 좋으니, 의대를 가야한다고 아버지 어머니 난리 부루스를 치셔서 급기야는 어느 대학 어느과를 가느냐를 놓고 사다리 타기까지 했지만, 내 고집대로 연대 전산과를 넣었다. 패들고 판돈거는 도박판 시절 입시제도라 2지망, 3지망까지 있었지만, 관심도 없었다. 근데 1지망은 떨어지고 2지망에 합격했다. 식공과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지원은 했으나, 사실 뭐 공부하는 과인지도 잘 몰랐다. 재수하기로 했지만, 혹시 모르니 등록은 하기로 했다.

3) 1학기 엠티

대학 입학하고 4월쯤인가 이제 슬슬 학교 휴학하고 재수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시점. 과 엠티 간다 해서 따라갔다. 거기서 어떤 여자애를 봤다. 그리고는 휴학을 할 수 없었다. 그 여자애랑 7년을 사귀고, 20년을 한집에서 살고, 아들 둘을 낳을 줄은 정말 몰랐다.

4) KAIST 입학과 박사학위

KAIST 에 입학한 이유는 단 한가지 였다. 병역특례. 석사1년차 지지리도 공부 못했다. 박사과정은 석사때 성적 상위 50%는 무시험, 그 밑에는 별도 시험을 봐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제도가 나 2년차 올라가며 사라졌다. 박사까지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석사 막판 지도교수님이 물어오신 취업자리가 경남인지 경북인지 어디 자리잡은 기업연구소였다. 대전도 억울해서 죽을판인데, 거기까진 죽어도 못 가겠더라. 그래서 얼떨결에 박사과정 올라갔다.

5) 벤치탈출과 화이트칼라 입성

박사에 포닥에 그렇게도 하기 싫은 실험 신물이 나도록 해대고는 모 기업연구소에 취업했다. 생물화공쪽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 입사 1년도 안되어 IMF 가 닥치고 팀이 박살났다. 화장품 회사다보니 화장품 소재 연구쪽에 배정되었다. 바이오의 “바”하고도 관련 없는 프로젝트였다. 나중은 어찌되건 의무복무 3년은 짤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비타민C 가지고 쪼물딱 대던게 사장님과 임원들 모시고 연구소 show and tell  하는 기술전략회의에서 대박을 쳤다. 전략과제로 선정되고 제품 기획까지 들어갔다. 근데 결과가 재현이 안 된다. 연구소에서 뻥쟁이로 몰려 견디기 힘들더라. 마침 그때 본사에서 CVC 를 만들어 바이오와 연관산업 투자하겠다고 연구소에 인력차출 요청이 들어왔다. 바이오 배경에 사업감각 있는 똘똘한 젊은 친구가 요건이었는데, 똘똘한 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회사에 박사풀이 없었던 시점이라 바이오 배경에 젊은 두가지에 걸려, 벤치 탈출 화이트 칼라 입성하게 되었다.

6) MBA

10년 넘게 공돌이로만 살다 본사로 와서 왕회장님 기술스태핑을 하다보니 띨띨함에 기가 차셨는지, 재 어디 보내 공부 좀 더 시키라 하셨단다. 그 분이 연대 경영학과 출신에 기부도 많이 해서 그랬는지, 경쟁률이 10:1 이 넘는다 하길래, 당근 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입사 원서에 그 양반 추천서 붙여서 냈더니 대박에 붙더라. 일주일에 이삼일 저녁때 수업듣는 파트타임 과정인데, 술 먹느라 바빠 학교에 자주는 못갔지만, 덕분에 아직도 경제경영 서적 찾아읽고, HBR 정기구독하는 습관이 들었다. 무엇보다 파생상품 배우며 무형자산의 가격을 이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에 홀딱 빠졌었다.

7) 신약후보물질 라이센싱

2004년 연구소에서 개발하던 진통제 후보물질을 독일의 모 제약사에 1억유로 넘는 규모로 라이센싱 아웃했다. 내가 잘했다기 보다는 당시 animal POC 완료된 VR1 길항제 후보물질 가지고 있는 바이오벤처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deal 이었다. 지금의 CAR-T 급이라고나 할까? Dealmaking 에 있어 내 기여도가 얼마나 되었건 어쨋든 그 시점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실력이다. 협상의 7요소 (interest, option, alternvative, commitment, legitimacy, communication, relationship) 를 어떨게 combination 해야 하는지, 지면에 보도되는 라이센싱 뉴스를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안 믿어야 할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습게도 하루 아침에 신약라이센싱 전문가가 되어 버렸다. 6개월전만해도 신약개발 강좌에 학생으로 앉아있었는데, 이 deal 을 기점으로 강사가 되었다.

8) 태평양제약 전직 그리고 약장사

화장품 회사에서 CVC 투자하고, 신약 라이센싱 하고, 특허 관리하고 등등 하고 있는데, 관계사 태평양제약에 마케팅 상무로 계시던 어떤 분이 술만 드시면 나한테 그러셨다. 너 어디가서 약업계 사람이라 그러지 말라고, 발에 진흙 한번 안 묻힌게 무슨 약장사냐고. (이 분 나중에 태평양제약 대표이사 되셨다). 진창에 같이 구르자고 그 분이 힘을 쓰신 건지 다른 힘이 작용한건지, 2007년 태평양제약으로 발령이 났다. 기술전략팀장이라는데, 뭘 하라는지 업무목표도 없더라 (솔직히 처음엔 나가라는 말인지 알았다). 3개월인가 있다가 개발팀장으로 발령내더니, 1년이 지나니 사업부장으로 승진시키더라. 그때까지는 좋았는데, 뭔 컨설팅 회사 불러 6개월 가깝게 컨설팅 받더니, 회사의 문제는 시장지향적 신제품 개발역량의 부족이라고, 개발부서와 마케팅 부서를 합쳐 버렸다. 그리고 그 부서를 내가 맡았다. 그러고는 3년간 약팔았다. 그 분 말씀대로 진창에 굴러봤다.

위에 열거한 8가지 이벤트 하나하나가 모두 현재 이장영을 만들어낸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 하겠지만, 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고르라 한다면, 8번 로컬 제약사에서 발에 진흙 묻히고 진창에 빠져 가며 약장사 해 본 경험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역시 카티스템이란 희안한 약 파는 처지이긴 하지만, 동아라는 파트너사를 두고 하는 간접 영업인지라 진창에 구르며 산다고 까지 하기는 좀 그렇다. 앞으로 신약을 개발하던, 개발중인 신약 프로그램을 기술이전하던 아니면 남이 개발한 신약을 들여오던간에 5년 가까이 시장에서 고객과 경쟁사와 악다구니 했던 경험이 큰 자산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비영리 연구소에서 연구개발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목적은 매출과 이윤 추구이고, 결국 파는 행위가 없다면 이 모든게 다 공염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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