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렇게 시작해 보자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대학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들은 정치학 개론에서는 정치의 목적은 사회의 갈동해소라고 배웠다. 다양한 집단이 구성하는 것이 전체 사회이기에 그들간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정치가들은 이런 대립이 폭력이나 투쟁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절충하고 타협하여 적절한 선에서 해결하는 것이 그 존재이유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반대로 흐른다. 갈등을 해소하라는 정치가들이 갈등을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
일례로 어제 공권력이 투입된 철도파업 그리고 의료계의 핫이슈인 의료민영화를 생각해보자.
이 두가지 모두 핵심은 민영화에 대한 찬반 논쟁이다. 정부는 아니라고 발뺌하지만, 진행되는 절차는 결국 철도와 의료 모두 민영화로 가는 수순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아니라면 도대체 정부가 정책을 강행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반대하는 쪽은 민영화가 가지고 올 여러가지 폐해를 들며 목숨 걸고 반대한다. 그 폐해라는 것의 대표적인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가가 관여하게 되면, 공공재의 성격이 강한 철도나 의료 모두 가격이 무분별하게 올라갈 것이고, 결국 이는 국민 모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신다는 어떤 분이 자신의 의료비 청구서까지 공개하면서 의료민영화의 폐해에 대해 올린 글이 있더라. 중병이 걸린 것도 아닌데 음식 잘 못 먹고 앰뷸란스에 실려 병원 응급실에 몇시간 있다 왔더니 진료비 총액이 1200만원 청구되었다며, 한국은 절대로 의료민영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의료민영화의 극단에 서 있는 나라이고, 천문학적인 진료비는 이미 유명하다.
그렇다면 민영화는 절대악일까? 칼 막스 선생은 일찌기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는 내재적 모순으로 인해 필히 붕괴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를 충실히 따른 몇몇 공산주의자들은 20세기 인류 사상 최대의 공산주의 실험을 수십년간 했으며, 아직도 몇몇 나라가 지상낙원, 인류 천국이라며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20세기를 막내리며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비해 효율과 생산성에서 도저히 경쟁할 수 없음이 자명해 졌고, 결국 자본주의 일방적 승리로 결론이 났다.
세상사는데 효율과 생산성이 전부가 아니며, 때로는 이보다 정의와 평등이 더 우선할 수도 있으니 자본주의의 승리를 모든 것에 다 적용할 수는 없겠다. 경제학에서도 시장의 실패, 공공재의 비극등 자본주의가 때로는 득보다 실이 되는 경우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생산성의 증가는 임금과 고용의 증가를 함께 가져 왔고, 무엇보다도 최적화를 통한 생산비용의 감소를 통해 시장가격의 하락을 불러 왔다. 만일 포드나 카네기 혹은 에디슨 같은 자본주의의 거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천만원 남짓으로 자동차를 사고, 백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PC 를 살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을까?
미국의 치솟는 의료비가 민영화에 의한 폐해라고? 내 보기엔 천만의 말씀이다. 통계학에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라는 유사하나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 있다. A가 증가하면 B 도 증가 (상관관계) 한다는 한가지 사실로, A 의 증가가 B 의 원인 (인과관계) 이라고 볼 수 는 없다. 미국의 천문학적 의료가격의 배후에는 민영화라라기 보다는 공공재의 비극이 숨어 있다.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더 부자 나라긴 하지만, 앰뷸란스 한번 실려가 응급실에서 검사 좀 받고 진통제 한방 맞았다고 1200만원을 내라는 주장에 쉽게 수긍할 미국인은 거의 없다. 문제는 1200만원이 나오건, 1억2천만원이 나오건 직장에서 제공하는 적절한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면, 얼마가 나오던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내 주머니에서 돈 나가는 것이 아니고, 직장에서 내 주는데 뭐 할 일 없다고 1불, 2불 따져가며 가격이 적정한지 따져보겠는가? 보험사도 지출이 늘어나면, 의료보험료를 올리면 되니 의료비 청구되는 것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실제 비용을 부담하는 기업 역시 이윤이 나는 한 직원복지로 나가는 의료보험에는 세금절감 효과가 있으니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결국 민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한 비용에 대해 신경쓰는 사람이 누구 하나 없다는 것이 문제고, 가격이 이러한 비용구조에 기반해 결정되니 결국 피해는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에게 오롯이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민영화나 공영화냐의 what 의 문제가 아니라, how 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철도 문제 역시 마찬가지라 본다. 물론 시장에서의 자유경쟁 제도 보다 적절한 독점이 전체적인 사회 효용에 더 바람직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전기나 철도, 도로 같이 인프라 건설에 엄청난 초기 투자가 요구되는 경우 개별 업자가 관여하여 중복투자 혹은 불완전 투자를 하는니, 규모가 업체 단독 혹은 몇몇이 (정부를 포함) 전체를 맡아 독점 혹은 과점을 유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다. 그렇다면 작금의 코레일 상황이 이 전제와 맞는가? 코레일 (코레일 뿐 아니라 다른 국영기업도) 의 적자 그리고 이를 메우려는 부채규모가 정부의 부채규모의 몇배에 달하는 상황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영구조적인 부분을 포함하여 내부 운영효율 및 생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리고 효율 및 생산성 제고에 있어서는 정부보다는 민간이 뛰어나다는 점은 이미 전세계 적으로 인정된 바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인위적으로 눌러왔던 운송가격이 올라갈 수는 있다 (솔직히 동일 거리 일본의 신간센과 KTX 의 운임을 비교해보자. 우리가 뭐 열불나는 재주가 있다고 신간센의 몇분의 일 운임으로 흑자를 기록할 수 있겠나).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효율화를 통해 운임은 적정선을 찾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 와중에 현재 코레일 직원들 상당부분이 정리될 수 있겠으나, 방만한 직원수가 비효율에 주범이었다면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협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간의 이해 (interest) 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협상의 대안 (alternative) 이 어떤 것이 있는지, 그리고 이해관계를 절충할 수 있는 옵션 (option) 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는지 협상의 전략이 도출된다. 그런데 이 이해가 솔직하지 못하고 두루뭉실하게 포장되어 있으면, 여기서 부터 파생되는 대안이니 옵션 모두 아무런 가치 없이 허망한 것이 될 뿐이며, 결국 협상은 무너지고, 폭력과 힘에 의해 약육강식으로 해결된다.
생산성과 효율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절대 우월하지 않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발전 상황을 보아도 쉽게 들어나며, 경제의 급속한 발전기간 대부분의 선진국들도 전제정치의 길을 걸었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 시점에 다시 옛날로 돌
아가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지상주의 독재체제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사회는 너무 복잡해 정부 혼자 이끌어나갈 여력도 되지 않는다. 근본으로 돌아가 각각의 이해단체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점을 명확히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절충할 수 있는 안을 찾자는 것이다.
최소한 민영화는 이해관계하고는 상관 없는 방법론의 문제이다. 정치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사회 이슈를 선점하려고만 하니, 문제는 문제대로 뱅뱅 돌고, 해결책이라고 나온 것은 갈등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아닐까?
의료민영화가 되건 철도민영화가 되던 내 눈앞의 이해관계하고는 크게 상관 없는 일이니, 대체로 안녕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전혀 안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