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과 전략적 옵션

한참 전 지인이 페이스북에 Healthcare2030 이란 그룹을 만들고 초대해 주셨다. 온라인 보다는 오프라인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는 보건의료 관련 전문가(?) 들의 소모임인데, 한달에 한번 모여 주제를 놓고 한두명의 참가자가 발표하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일본으로 치면 공부회 같은 모임이다. 시작한지는 벌써 몇달이 지났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다 어제 처음으로 참석했다.

어제의 주제는 “벤처기업이 본 VC, 그리고 VC 가 본 벤처기업” 이었는데, 최근 상장한 바이오벤처 업체의 CFO 께서 벤처기업 입장에서 VC 에 대한 시각, 그리고 반대로 국내 유수의 바이오 전문 심사역께서 VC 가 본 성공적 바이오벤처라는 주제로 발표하셨다. 사실 한자리에서 상반된 시각의 발표를 동시에 들을 기회는 많지 않기에 모임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고, 상당히 thought provoking 한 시도였다. I really enjoyed.

양단의 시각이 얼마나 차이가 나고, 얼마나 유사한지와는 별개로 지속가능성 즉 sustainability 를 생각한다면, 중요한 것은 기업의 본질가치가 얼마이고, 이것이 얼마나 솔리드하게 또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느냐에 핵심이 있다.

예전에도 한번 어디엔가 쓴 기억이 있는데, 신약개발이라는 것이 일단 후보물질이 정해지면 거기서 이미 운명은 정해진다. 그 다음은 후보물질이 똥이냐 된장이냐를 입증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나는 신약개발의 큰 단계를 pre 후보물질 그리고 post 후보물질의 두단계로 나누어 생각한다 (물론 출시이후 판매실적으로 판가름 나는 진검승부가 가장 중요하지만, 일단은 범위에서 제외하자).

Pre 후보물질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적 근거이다. 즉 이 물질은 어떠한 기작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떠한 효능을 보일 것이고, 또한 심각한 부작용을 없을 것이다라는 데이타로 뒷받침되는 과학적 근거 확보이다. Post 후보물질 단계의 핵심은 case collection 이다. 이러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환자 (혹은 healthy volunteers) 몇명을 대상으로 이러이러한 지표 평가를 해 보았는데, 예상대로 기대했던 효능이 심각한 부작용 없이 관찰되었다이다.

나 역시 예전에는 Pre 후보물질 단계쪽에서 주로 일해왔었고, 신약개발의 모든 가치는 과학적 근거에 있다고 생각했다. 작년 회사를 옮기며 식약처 허가를 득해 시장에 막 진입한 신약을 가지고 일하다 보니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과학적 근거 만큼이나, 잘 설계된 케이스 확보 (임상데이타) 가 중요하고, 그 중요성에 있어 전자냐 후자냐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많은 경우 신약개발을 글로벌 시장을 노려야 하고, 임상시험에는 엄청난 투자가 소요되므로, 이는 글로벌 big pharma 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알게 모르게 우리나라 신약분야 사업개발 혹은 정책기안자들이 가지고 있는 도그마가 되어 버렸다. 꼭 그럴까?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최종 허가까지 신약개발에는 1조가 드네, 그리고 1조중 70% 는 개발단계 즉 임상에서 소요되네 하는 말들 많지만,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임상시험에 가장 많은 돈이 드는 미국이나 유럽 (특히 미국) 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또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대형제약사 입장에서 실패한 프로젝트에 소요된 비용까지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만일 국내에서 임상 3상까지 수행한다 가정하면 물론 이 경우도 타겟질환군이나 후보물질의 물리화학적 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넉넉잡아 간접비 포함 200 억원이면 다 마칠 수 있다고 본다.

전세계 제약 시장의 2% 도 안되는 한국내에서 비비고 있어 무엇하냐, 한시라도 빨리 세계 시장에 눈을 돌리고 빅파마와 손잡아야지 무슨 소리냐. 200억원이면 전임상 단계에서 할 수 있는 POC (proof of concept) 실험이 얼마나 많은데, 차라리 거기에 돈을 쓰겠댜. 틀린말은 아니지만, 시스템이 갖추어진 허가기관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느냐 아니냐는 신약 가치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 역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식약처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상호인정 받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히 시스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물론, 한국 시장의 환경이 주요시장과는 동떨어진 일부 질환군이 있지만, 그것이 메인스트림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신약개발 바이오벤처 기업이 국내에서 임상을 주저하고, 임상 데이타가 없는 후보물질을 해외 라이센싱 하려고만 집중하는 이유중 하나는, 이들의 전문성이 임상단계가 아니라, 그 전단계 즉 합성이나 약리학이기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자기가 잘 알고 편하게 느끼는 분야에만 안주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리베이트니 뭐니 해서 우리나라 의사 평판이 많이 퇴색된 것 또한 사실이지만, 내가 만난 한국의 KOL 수준의 대학병원 의사선생님들 식견과 전문성 (그리고 최근에는 신약개발 전략에 있어서도) 놀랄 정도로 세계적 수준을 갖추신 분들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 국내 벤처기업의 신약개발 노력에 일조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열의도 많다.

페북이나 트위터는 부담없이 짧게 써지는 글이, 블로그 포스팅만 하려면 장황하게 산으로 가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신약개발 바이오벤처도 이제 도그마에서 빠져 나와 다양한 전략적 옵션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수백년간 수만명이 복용해온 한약이 제대로 대접 못받는 이유가 약리작용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함이 때문이요, 수조원의 블록버스터가 될 잠재성 있는 후보물질이 중간에 사장되기도 하고 헐값에 팔려나가는 이유는 임상데이타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자주 생각하는 케이스지만, 지금 식탁에 오르는 다양한 먹거리들 수만년 우리 선조들이 이거 먹어도 될까 말까 하는 여러가지 시도 끝에 살아남은 것들이며, 이 시도는 고민이 아닌 행동으로 바뀌었을때 비로서 작동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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