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

역사적으로 보아 대한민국 남자가 가장 비겁했던 때는 병자호란 직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남자들만이 사람 대접 받던 시절에 오죽들 못났으면 제 나라 하나 못 지키고, 오랑캐라 업신여겼던 여진족들이 세운 청나라에 나라 다 짓밡혀 놓고는, 전쟁통에 끌려가 욕 당하고 온 제 며느리 제 딸들을 화냥년이라 손가락질 하면서 다시 내쫓는 멘탈리티는 아무리 역사는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해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다.

흔히들 경쟁력 없는 국내 제약 산업을 얘기하며 가장 큰 원인으로 국내 제약사들이 어려운 R&D 는 뒷전으로 놓고 손쉬운 리베이트 영업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로컬 제약사에 수년 몸담았던 경험으로, 어느 제약사도 리베이트 영업 하고서 싶어서 하는 곳 없다. 남들이 다 하니 독야청청 나만 뒤쳐질 수 없는 노릇이고, 더 중요한 것은 리베이트 영업 말고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한다.

전직장에서 일년에 한번 혁신올림픽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틀에 걸쳐 하루는 영업직, 하루는 비영업직의 혁신사례를 발표하는 것인데, 한번은 영업직 경선에 그룹 계열 제약사 직원이 나가 발표한 적 있었다. 대상은 못 탔지만, 어쨋든 수상은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발표를 들으셨던 그룹 CEO 께서 아무리 성과도 좋지만, 직장 생활이라는 게 일단은 즐거워야 할텐데, 그렇게까지 하며 영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냐고 말씀하셨던 정도였다. 이 자리에 다 옮기기는 뭐하지만, 쉽게 예를들자면 명절에 자기 조상들 산소 성묘가 벌초는 못해도, 거래처 선생님들 선산은 찾아가 할아버지는 물론 증조 고조 할아버지 산소까지 깨끗하게 벌초하고 온다 정도면 감이 올까?

정부의 리베이트 단속에도 신물이 나고 제약사 본연의 R&D 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내겠다고 국내 모 제약사 사장님께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가정해 보자. 없는 돈에 투자하여 연구소 만들고, 연구원 뽑아 어렵다는 바이오의약품은 안 되더라도 합성신약을 연구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프라는 만들었다고 치자. 얼마전 페이스북에 올렸던 Nature Review 에 발표되었던 평균 신약개발 성공확률과 소요비용 그리고 소요시간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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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와 있는 자료에 기반할때 Hit 물질 하나가 비임상, 임상단계를 거쳐 신약으로 출시할 수 있는 확률은 4% 이다. 그래서 하나의 신약을 출시하기 위해서는 Hit 단계의 연구과제 25개가 필요하다. 4%밖에 안되는 낮은 확률이지만, 25개 과제 운영할 능력은 안 되니 죽이되던 밥이되던 똘똘한 과제 하나 골라 올인하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하자. 일단 윗그림에 나타난대로 평균치만 따라간다 해도 13.5년이 걸린다. 비용은? 역시 평균치만 따라가더라도 $264m 대략 우리돈으로 2900억이 소요된다. (주의할 점은 위의 통계치는 그래도 신약개발에 상당한 경험이 있는 다국적 제약사의 평균이다. 초보 회사는 당연히 삽질을 할테니, 성공확률이나 소요기간은 더 걸리게 된다. 또 소요비용 2900억원도 미국기준이다. 국내에서 개발한다면 이것이 약 20-25% 정도, 그러니까 약 600억에서 730억원 정도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4% 확률에 이 소요비용, 이 소요시간이 걸리는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고 등떠미는 놈도 나쁜놈이지만, 등떠민다고 하는 놈은 더 미친놈이다. 하지만, 우리의 용감한 사장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올인하고, 차입에 증자에 활용할 수 있는 financing 수단은 다 동원하여 신약을 반드시 개발하겠다고 다시 한번 결심하신다. 이순신 장군만큼 훌륭하시다. 을지문덕 장군처럼 충성스럽다. 강감찬 장군처럼 용감하시다.

하지만, 이 통계 자료에 반영되지 않은 한가지가 더 있다. 바로 규제의 일관성이다. 제약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보다 (항공업이나 건설업도 심하다지만 그보다 더) 정부의 규제에 묶여 있는 산업이다. 허가도 정부가 정하고 가격도 정부가 정한다. 허가와 약가까지 잘 넘어갔다 해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각종 규제가 또 장난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부분이니 다 이해한다. 문제는 이 기준이 사전에 제대로 된 예고도 없이 들쑥날쑥한다는 점이다. 어떤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한마디 하면 바뀌고,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또 바뀌고, 언론에서 한번 쑤시면 또 바뀐다. 세계화 시대에 수출위주의 우리 경제에 성장 돌파구를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시작한 한미, 한-EU FTA. 자동차, 반도체 살리느라 제약, 농업은 걸레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건강보험이 의무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 의료비의 상당부분을 건강보험 재정으로 cover 해 주니 지속가능의 측면에서 그것까지도 이해한다고 쳐주자. 하지만 국내 제약사가 정말 외로운 것은, 감독기관이라는 식약청, 심평원 그리고 보험공단까지 아무도 제약사 편이 없다는 것이다. 담당 연구관이 바뀌면 처음부터 다 다시 시작해야 하고, 사전상담이니 pre-IND 니 수십번의 상담과 회의를 하고 나서 개발을 시작해도, 나중에 안색하나 안 변하며 손바닥 뒤집는 것 보면 제약사 개발 담당자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고 눈이 돌아가기 일쑤다. (나 역시 수태 겪은 일이지만, 그래도 같은 학교 약대 출신이면 사전에 언질도 주고, 뒷자리에서 네고도 쳐 준다는 믿고 싶지 않은 소문도 있다.)

얼마전 미국이나 유럽같은 의료선진국은 아니지만, OECD 국가이고 나름 의약품 인허가에서는 선진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모 국가의 식약청과 인허가 관련 사전상담을 한적이 있다. 서면으로 사전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 식약청과 마찬가지였고, 미팅전 아 정말 꼼꼼하게 읽어보았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납득할만한 question list 가 송부되어 왔다. 더욱 감동스러웠던 것은 상담 이후 2주내에 업체가 회의록을 서면으로 작성해서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검토 이후 참석한 공무원 모두의 서명이 담겨 공식문서화 되어 돌아왔다.

기업이 투자집행하는데 있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control 할 수 없는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이유에 의한 불확실성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최대한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운용하는 제도에 대한 불확실성은 걷어주고 나서 R&D 는 뒷전이네, 손쉬운 리베이트 영업만 하네 욕해야 하지 않을까? 콜롬버스네 파이오니어네 (최근에는 국가신약관리단인가 뭐 그런것도 생겼더라) 하며 집어주는 몇푼 연구비 안 주는 것 보다 고맙긴 하지만, 주는 분이나 받는 놈이나 정말 그걸로 뭐가 될거라고 기대하고 받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과거 관리관청에서 가이드 해 주고, 자문해 주는대로 따라서 중간에 개발방향도 바꾸고 프로토콜도 바꾸면서 열심히 개량신약 개발한 경험이 있다. 최종 허가단계에서 몇번을 보완 요청하더니, 결국은 서방성제제에 대한 인허가 가이드라인이 발표되고, 우리 제품은 XX 시험이 추가되지 않으면 허가해 줄 수 없다고 전화로 연락이 왔다. 눈이 팽 돌아, 그럼 지금까지 하셨던 말씀은 다 뭐였냐고 했더니, 글쎄 우리 직원들이 아직 공식 가이드라인이 나오지 않아 상담에 실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런점이 있다면 죄송하단다. 혹시나 사전 상담 내용중 문서로 남아 있는게 있을까 싶어 찾아보았더니, 모두 내부문서 우리까리 작성한 것이지, 그 기관에서 그러그러하게 자문했다고 입증할만한 어떤 문서도 없더라. 언제 업계를 떠나면 공개하리라 마음 먹고 그 전화내용 녹음해 두었지만, 아직 업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나 공개가 가능할런지 모르겠다.

17세기 우리 할머니들도 먹었던 욕이었으니, 지금와 그 후손들이 또 같은 욕 먹는다 팔자라고 생각해야 할까? 화냥년….

3 Comments
  1. hyunsung oh 2013년 2월 19일 at 1:52 오전

    정말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사회학 이론 중 신제도주의이론 (neo-institutionalism)에 따르면, 조직을 구성하는 인력들이 집단적으로 믿는 관습이나 규범이 변화하지 않을경우, 리더나 외부 관찰자가 그 조직의 공식적인 구조를 변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기대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외국에서 한국의 공무원사회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공식적인 구조와 관련 법들은 그 어느 선진국보다 훌륭하지만, 공무원들의 의사결정에 따라서 시장의 전반적인 게임의 룰이 정해지던 개발독재시대의 마인드가 끊임없이 공무원들 사이에서 학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국 사회복지 및 의료분야에서 개별 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과 각종 프로젝트를 하면서 관계를 해본 결과, 대부분이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행정고시 출신과 같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내는 학계를 경험하지 않고 학부만 졸업한 사람들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습니다. 이 곳은 박사를 마친 사람들이 그러한 역할을 위하여 고용되더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창조 및 적용과 관련된 일반적인 규범을 공무원들이 잘 이해하고 있고, 이러한 공통된 이해가 일을 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 vaniice 2013년 2월 19일 at 8:45 오전

      공무원 개개인의 자질이나 경험도 중요하지만, 공보다 과 중심으로 평가하는 공무원 평가 시스템 자체가 더 문제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 hyunsung oh 2013년 2월 20일 at 3:27 오전

        저도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특히, 과도하게 “관리” 및 “안정성”에 초점을 둔 평가시스템은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공무원에게 사업의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21세기 글로벌 경제시대에서는 “독창성”과 “선도”가 점점 더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무원을 선발 및 재교육 시키는 과정에서 학계 및 산업계의 전문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공무원사회에 있는 “안정”을 중시하는 문화가 재생산된다면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의 향상에 주요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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