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과 생략의 미

제약업에서 화장품으로 넘어오면 (제약이라고 꼭 신약일 필요는 없고 복제약도 마찬가리라 생각합니다만) 개발과정, 특히 POC (proof of concept) 과정에서 “그렇다 치고” 로 넘어가는 것에 숨이 턱 막힐 때가 종종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화장품 회사에서도 짧지 않은 시간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 있으니 절대 우리 회사만의 일은 아니라 장담한다. 반면 제약에서의 개발은 규제의 까다로움이 일차 원인이겠지만, 이것이 당췌 허용되지 않는다. 심한 경우 GMP 공장의 분석 장비 레이아웃이 조금 바뀌어도 동등성과 관련한 validation 을 요구받는다.

약업이건 장업이건 “업”이라 할때 궁극적인 목표는 고객에게의 판매이다. 네이버 지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고객들 “그렇다 치고” 의 빈공간이 남아 있는 한 절대 설득되지 않고, 설득되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는다. 이 지점이 바로 화장품에 있어서 여백과 생략의 아름다움이 되겠다. 서양예술과 대비한 동양예술의 아름다움은 여백과 생략에 있다고 미술시간에 배웠다. 감상자는 여백과 생략의 빈 공간에서 상상력을 통해 작가가 비워 놓은 창조 작업에 동참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의약품은 잘 짜여진 논문이라 한다면, 화장품은 느슨하게 풀어나가는 소설이라 하겠다 (철저히 제 개인적인 비유입니다). 의약품이 왜 너랑 나랑 사귀어야 하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한다면, 화장품은 ‘나 매력 있지 않아?’ 하고 슬쩍 넛지하는 식이랄까?

서로 비슷하지만 상이한 개발과정을 거쳐 시장에 나가다보니, 의약품은 환자나 의사의 후기나 비평도 이래서 싫고 좋고가 분명하다.  예를 들어 통증이 사라졌다, 복용편이성이 좋다 혹은 나쁘다, 부작용이 있다 없다등등.  그래 약값이 너무 비싸다도 포함. 반면, 제품이 싫다는 화장품 후기는 겉으로는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끈적인다등등 좋고 싫음에 타당한 이유가 있는 듯 하지만, 딱 꼬집어 말하긴 뭐하지만 웬지 그냥 싫다의 변주곡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혼사유의 대부분이 그 누구도 검증할 수 없는 부부간 성격차이라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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