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밥

요즘은 출장이 많이 줄었지만, 한때는 한달의 반은 밖으로 나돈 적도 있었다. 출장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음식인데 (꼭 출장이 아닌 여행도 마찬가지겠지만, 출장은 일이 먼저니 특히 더합디다), 나 같은 경우는 사실 김치나 라면따위 향수로 고생한 기억은 없다. 문제는 쌀 혹은 밥인데, 쌀밥만 먹을 수 있다면  2-3주 출장 정도는 큰 문제 없었다. 중국집은 전세계 어디를 가도 (물론 내가 가 본 나라 기준입니다만) 찾기 어렵지 않고 중국집엔 볶음밥과 함께 steamed rice 를 같이 파는 것이 norm 이니, 여태껏 출장 다니며 음식 때문에 큰 고생은 안했다는 얘기다. (쌀에 관하여 참고로 저는 자포니카종 말고 동남아 애들 많이 먹는 바람 불면 훌훌 날린다는 롱그레인으로 지은 밥도 좋아합니다.)

최근까지도 집에 밥솥은 신혼때 집사람이 장만해 온 코끼리표 조지루시를 썼었는데, 얼마전 고장 나 버렸다. (사실 고장난 지 꽤 되었습니다.) 이십년 가까이 쓴 밥솥을 수리한다고 어디 맡기는 것도 그렇고 해서 새로 장만하기로 했는데, 온라인이고 오프라인이고 요즘 밥솥은 다 쿠쿠 아니면 쿠켄이더라. 밥솥 하면 일제 코끼리표는 이제 옛날말. 중국 관광객들 한국 관광 쇼핑 순위에도 쿠쿠 밥솥이 상위권이란다.

어려서부터 밥하면 엄마가 해 준 냄비밥이 최고였다. 뚝딱뚝딱 냄비에 밥 앉히고 두부 넣어 찌게 하나 끓이고 김치에 밑반찬 뭐 이런 조합인데, 냄비밥엔 덤으로 누룽지까지 따라온다. 코끼리표 조지루시는 전기밥솥이라도, 누룽지 없다는 것 빼면, 냄비밥 그 맛을 일부 가지고 있는데, 쿠쿠는 아니올시다. 밥 다 될 쯤 압력 빠지는 소리 날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어쨋든 밥솥 교체 후 인생의 즐거움 하나가 날아갔다. (정히 냄비밥이 그리우면 햇반을 레인지에 돌려 먹습니다.)

명절이면 항상 그렇지만,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다보면 항상 속이 더부룩하고 때가 되도 별로 밥생각 없고 그렇다. 이럴땐 한 두끼 정도 굶으면 금방 회복되는데,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굶을까 하던 참에 집사람이 둘만 먹어야 하는데 밥 새로 하기도 뭐해서 냄비밥 했단다. 반찬은 어제도 그제도 먹었던 토란국에 모듬전 그리고 삼색 나물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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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7시반쯤 먹었고 이 글을 쓰는 시각은 10:50분. 부엌 지나가다 먹고 남은 냄비밥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하다. “언제든지 밥 댕기면 퍼 드세요 주인님”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냄비밥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 지는데, 자주 좀 못 해 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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